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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그 때, 그 사람] 표준이자 교과서,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셰링

기사에 나온 방송을 들어보세요! 55:01

여러분은 평소 ‘고급스럽다’ 는 느낌을 어떤 순간에 경험하시나요? 명품 옷을 구경하거나 입어볼 때, 아니면 하얀 접시에 정갈하게 담긴 요리를 맛볼 때?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에, 아니 그 소리에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처음 가진 건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네요) 4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대형 공연장에는 어디에나 있는 유명한 독일제 피아노의 건반과 터치를 생전 처음 접하며 제가 받은 느낌을 대변할 때, ‘참 고급이다’ 는 말보다 정확한 것이 없었던 것 같네요. 

 

이번 주인공은 제가 오랫동안 팬의 마음을 갖고 있는 연주자인데, 왜 이제야 소개하게 됐는지 아쉬울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울림을 지니고 있구나! 라는 깨달음을 처음 일깨워준 인물이죠. 20세기 바이올리니스트의 표준이자 교과서라고 불리는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셰링입니다.

 


헨릭 셰링(Henryk Szeryng) / 출처 http://classictong.com/artist/985

 

팬이라고는 하지만, 어린 피아니스트를 처음 사로잡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셰링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연주자는 나단 밀스타인이나, 아르튀르 그뤼미오, 이착 펄먼 등이었는데요, 셰링의 연주를 본격적으로 듣게 된 것은 유학을 간 후 우연히 접한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와 소나타 음반을 들은 다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새삼 그가 연주하는 악기를 통해 바이올린 고유의 음색에 눈을 떴다고나 할까요. 정말 고급스럽고 기름지고 우아함을 가득 담고 있는 소리였는데요, 그때까지 들은 바이올린 소리 중 제일 귀족스럽고, 점잖고, 편안했던 셰링의 바이올린 소리는 지금까지 그 첫인상이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곡들이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교과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죠.

 

독일 레퍼토리에서 강점을 보인 연주자이지만, 헨릭 셰링의 고향은 동유럽인 폴란드입니다. 1918년 바르샤바 근교 젤라조와볼라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쇼팽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죠.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이어 바이올린을 배워 10세가 되기 조금 전에 바이올린의 재능을 대가였던 브로니슬라프 후베르만에게 인정받아 그의 권유로 베를린에 유학, 명교사 칼 프레쉬를 사사하였습니다.

 


1935년의 헨릭 셰링 / 출처 www.henrykszeryng.net
 


1940년의 헨릭 셰링 / 출처 www.henrykszeryng.net

 

1933년에 죠르쥬 에네스쿠가 지휘하는 바르샤바 필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데뷔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구요, 그 후 파리에 나온 셰링은 파리 음악원에서 쟈크 티보와 가브리엘 부이용을 사사하여 더욱 솜씨를 닦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뛰어난 어학 실력으로 통역관으로 일하기도 하고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군의 위문에 크게 활약하였지만, 전후에는 바로 멕시코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시민권을 얻었죠.

 


1952년의 헨릭 셰링 / 출처 www.henrykszeryng.net

 

조용히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에 힘을 쏟던 셰링은 같은 폴란드인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 후반기의 운명을 바꾸게 됩니다. 1956년의 멕시코 연주 여행 중에 셰링을 만나 즉시 그의 실력을 알아본 루빈스타인은 셰링에게 연주 활동에 주력하기를 열심히 설득함과 동시에 유럽 음악계의 중심인물들에게 소개했고, 함께 레코딩도 남기게 됩니다. 미국에는 하이페츠, 유럽에는 밀스타인과 메뉴힌이 그 인기를 독점하고 있던 당시 뒤늦게 이름이 알려진 셰링은 그 후 활발한 솔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급속히 힘을 길러 20세기 후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명성을 확고히 하게 되죠.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과 헨릭 셰링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 출처 http://www.rolf-musicblog.net/beethoven-violin-sonata-op-303/

 

동향인이라고는 하지만 전공도 다르고 세대도 많이 다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의 만남이 정말 셰링의 음악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의 대가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남겨 놓은 레코딩들이 모두 명연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루빈스타인은 워낙 자기 색깔이 강하기도 하지만,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강했던 사람이죠. 그래서 주로 독주나 협연 무대에서 많은 능력을 발휘했고 실내악은 상대적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데요, 유독 셰링과의 듀오 무대에서는 앙상블을 위한 배려가 두드러집니다.

 

셰링과 루빈스타인의 베토벤 소나타 #5 "봄" Szeryng/Rubinstein - Beethoven Sonata #5 "Spring" Mvt.1

 

나이상으로도 두 사람은 30년 이상 차이가 나서 셰링이 거의 아들뻘이었는데, 루빈스타인은 바이올린의 스타일을 넉넉히 감싸고, 셰링은 귀족적인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프레이징과 음색, 분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는 모습이 훌륭합니다. 셰링도 자신이 추구하는 레퍼토리나 음악의 색채는 확실하지만, 또 다른 대가를 만나 작품이 가장 빛날 수 있는 방향으로 의기투합하는 모습에서 역시 현명한 연주자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정말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의 세계가 셰링의 바이올린인 것 같은데요, 지나치게 모범적이고 고상한 분위기를 고집하는 것 때문에 화려하고 번뜩이는 스파크가 일어나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재미없다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기교가 연주 효과를 내기에 불충분했나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는 않죠. 사실 어느 곡이나 셰링처럼 안정감 있고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정확한 테크닉과 그 외의 음악적 기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셰링이 화려한 외양이 돋보이는 곡을 많이 연주하지 않은 것은 그가 추구하지 않은 것이지,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분명 아니었죠.

 


1960년대 후반의 헨릭 셰링 / 출처 www.henrykszeryng.net

 

또 셰링이라고 늘 학구적이고 우아한 작품들만을 연주한 것은 아니구요, 그도 즐거움을 추구한 연주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소품들을 연주한 음반인데요, 셰링의 이미지와 한번에 연결되지는 않습니다만 작곡가의 의도를 재치있게 파악한 해석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전쟁을 피해 미국에서 살았지만 늘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그리워하며 그 향수를 바이올린 작품을 쓰며 달랬던 크라이슬러는 인종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멜로디들을 만들었는데요, 만년까지 멕시코에 거주했던 폴란드인으로 코스모폴리탄적 음악언어를 바이올린 연주를 통해 완성해갔던 세링의 세계와 일맥상통하는 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헨릭 셰링이 연주하는 크라이슬러 곡들 모음 Henryk Szeryng plays Kreisler and other treasures for the violin

 

 

[8월 15일에 방송한 KBS 1FM <KBS 음악실> 코너  “피아니스트 김주영의 ‘그 때, 그 사람’”을 재구성하였습니다.]

 


* 피아니스트 김주영의 ‘그 때, 그 사람’  선곡표

 

8. J.S.Bach
   * 파르티타 2번 D단조 BWV.1004 중 1. Allemande 2. Courante
   * Henryk Szeryng / Vn [05:11]

 

9. L.v. Beethoven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 중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 Henryk Szeryng / Vn Jacques Thibaud 지휘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 [23:52]

 

10. Fritz Kreisler
   * Recitativo and Scherzo
   * Henryk Szeryng / Vn [04:56]

 

11. Fritz Kreisler
   * Tambourin Chinois
   * Henryk Szeryng / Vn Charles Reiner / Pf [03:44]


 

 

스토리텔러 김주영 :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칼럼니스트인 김주영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 대학원에서 석사 및 연주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모스크바 프로코피에프 예술기념 국제 콩쿠르 1위 없는 2위, 파리 그랜드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 등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KBS 주최 한국의 음악가 음반을 녹음하였고, KBS 클래식 FM ‘KBS 음악실’에서 '김주영의 그 때 그 사람' 코너와 1라디오 '문화공감' 의 '올 댓 클래식' 코너, 세종문화회관 세종예술 아카데미 ‘정오의 음악회’ 진행자로서 클래식을 알리고 있다. 약 300여 명의 인터뷰를 진행했던 'KBS 음악실' MC로서의 활동과 그 외 여러 방송 경험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음악의 전 분야를 섭렵하려는 의욕이 늘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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